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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_배당주] 대한민국 1호 기업 유한양행_소개, 연혁, 배당금

머니정보왕 2023. 1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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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번 시간에는 대한민국 1호 기업인 유한양행 이라는 기업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해당 내용에 대해서 필요한 정보가 있다면 독자분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구독과 좋아요, 광고클릭은 블로그 운영에 큰 도움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유한양행 소개

 

 

 

 

모두의 건강과 행복이라는 큰 꿈을 가진 버드나무는 대한민국 국민과 함께 성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비전을 가진 회사가 바로 유한양행입니다. 유한양행은 "가장 좋은 상품을 만들어 국가와 동포에게 도움을 주자" 라는 창업자 유일한 박사님의 정신으로 1926년 설립되었습니다. 유한양행은 창업이래 지금까지 신뢰와 정직의 기업문화를 가지고 우수한 의약품 생산과 국민 보건 향상에 매진해 왔습니다. 국내 1등 제약사, 국내 대표 장수기업 등 외향적 성장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 등 사회공헌으로 대표적인 기업으로 성장해 온 기업입니다. 또한 유한양행은 국민보건 향상과 직결되는 의약품뿐만 아니라 건강기능식품, 생활용품, 동물약품등 인류의 건강과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다양한 사업에 진출하며 미래의 지속성장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끊임없는 연구개발을 통해 혁신적 신약개발로 글로벌 시장 진출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설립일  1926-06-20
대표이사 조욱제
상장일 1962-11-01
주소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로 74
전화번호 02-828-0181

 

 

 

 

유한양행은 대한민국 국민의 건강과 생활편의를 위와 같은 브랜드를 런칭하며 현재까지도 대한민국에서 사랑받는 기업으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유한양행 연혁_유한양행의 역사

년도 연혁내용
1926년 유한양행 창립
1936년 주식회사로 변경하고 경기도 소재 공장 건립
1941년 유한무역공사 설립
1942년 본사를 소사공장으로 이전
1962년 제약업계 최초 주식 상장
1969년 전문경영인 제도 시작
1970년 미국 킴벌리클라와 합작투자로 유한킴벌리 설립
1977년 코락스와 합작투자로 유한코락스 설립
1980년 유한화학공업 설립
1982년 유한스미스클라인, 유한에스파, 유한사이나미드 설립
1983년 한국얀센 설립
1985년 국내 최초로 KGMP 적격업체로 지정
1988년 국내 제약업계 최초로 중앙연구소가 KGLP 적격시험기관으로 지정
1994년 인볼 그레란사에 간장질환치료제 YH439 기술 수출
1997년 서울시 대방동 신사옥 준공
1998년 세계최초 자체개발 면역억제제 고형분사기술을 미국의 쉐프링라우사에 기술수출
200년 스미스클라인비챰사에 항궤양물질 YH1885 기술수출
2007년 일하기 좋은 기업대상 수상
2009년 신뢰기업대상 수상
2011년 엔솔테크 투자 및 퇴행성관절염 치료제 공동개발 계약 체결
2014년 제약업계 최초 매출 1조 달성
2015년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 12년 연속위 1위
2017년 2억불 수출탑 수상
2023년 매출액 1조7960억 기록

 

 

유한양행 배당금

배당락일 배당금 배당금지급일 배당수익률
2023년 12월 27일 381 2024년 04월 08일 0.60%
2022년 12월 28일 400 2023년 04월 06일 0.67%
2021년 12월 29일 400 2022년 04월 01일 0.59%
2020년 12월 29일 400 2021년 04월 02일 0.52%
2019년 12월 27일 2000 2020년 04월 03일 0.81%
2018년 12월 27일 2000 2019년 03월 29일 0.91%
2017년 12월 27일 2000 2018년 04월 06일 0.88%
2016년 12월 28일 2000 2017년 03월 31일 0.94%
2015년 12월 29일 2000 2016년 03월 31일 0.75%
2014년 12월 29일 1750 2015년 04월 02일 1.01%
2013년 12월 27일 1500 2014년 04월 10일 0.80%
2012년 12월 27일 1250 2013년 03월 27일 0.71%
2011년 12월 28일 1250 2012년 03월 28일 0.94%
2010년 12월 29일 1000 2011년 03월 30일 0.56%
2009년 12월 29일 1000 2010년 03월 25일 0.55%
2008년 12월 29일 1000 2009년 03월 26일 0.45%
2007년 12월 27일 1000 2008년 03월 27일 0.48%
2006년 12월 27일 1000 2007년 04월 03일 0.54%
2005년 12월 28일 1000 2006년 04월 06일 0.53%
2004년 12월 29일 1000 2005년 04월 07일 1.13%
2003년 12월 29일 1000 2004년 03월 30일 1.51%
2002년 12월 27일 1000 2003년 04월 08일 1.83%
2001년 12월 27일 1000 2002년 04월 11일 1.57%
2001년 01월 02일 750 2001년 04월 10일 1.88%
2000년 01월 04일 1000 2000년 04월 06일 2.79%

 

참고로 유한양행은 주주환원정책으로 주주들에게 배당금을 지급하는 것 뿐만 아니라 무상증자도 실시하고 있습니다. 대략 5%입니다. 즉 1주당 0.05의 무상신주를 배정을 하는 것 입니다. 대략 20주 정도 가지고 있으면 1주를 배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단수로 배정을 받더라도 단주대금이 주주들에게 주어지니 배당수익률 이외에 현금흐름을 만들 수 있습니다.

 

( 단주대금이란? 정수로 떨어지지 않는 수량에 대해서 발행사에서 발행기준가격으로 단주수 만큼 곱하여 대금을 지급하는 것을 단주대금이라고 합니다. )

 

이러한 무상신주로 배정받은 수량은 점차 계속해서 쌓여 다음년도에 배당을 지급받을 수 있는 권리와 무상으로 신주를 배정받을 수 있는 권리를 복리로 쌓을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므로 이러한 주주환원정책은 자사주를 매입하여 소각시키는 효과와 동일한 효과를 냅니다. 실제로 유한양행 이외의 무상신주를 발표하는 회사들은 무상증자를 호재의 소식으로 인식하여 공시 발표후 주가가 많이 올라가는 경향을 보입니다.

 

유한양행과 창업자 유일한

 

나무위키 - 출처

 

 

유한양행은 독립운동을 주도한 기업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독립운동과 자국애를 가진 대표적인 기업으로 손꼽히는데, 이러한 사회공헌에 이바지한 분이 유한양행의 창립자 유일한 박사님입니다. 유일한 박사님은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현하고자 하는 분들에게 정말 알아야 하는 모범적이며 존경받아야 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1985 평안도에서 태어납니다. 대한제국시기에 미국으로 건너가 유학길에 오르게 됩니다. 유학길에 오르고 나서 그는 미국에서 사업가로 변신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에서 중국인과 중국계 미국인을 상대로 숙주나무 통조림 사업을 하며 번창한 사업가가 됩니다. 

 

1926년에 귀국하여 경성부 종로2정목(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2가)에 유한양행을 설립했습니다. 그가 대한민국으로 귀국하여 사업을 시작한 이유는, 라초이 회사 경영 때 필요한 녹두를 구입하기 위해 중국에 갔다가 북간도에 거주하던 부모와 동생들을 만난 일 때문이었습니다. 부모님은 장남 유일한이 보내준 돈으로 땅을 사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대다수의 조선인들은 빈곤과 기아로 인한 질병에 허덕여 굶주림으로 죽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유일한의 아버지는 민족의 미래를 위해 미국으로 아들을 유학보냈으나 식품회사 경영을 하던 아들에게 많이 실망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겨우 숙주나물 장사나 하라고 너를 미국에 보낸 줄 아느냐? 큰 공부를 했으면 큰일을 하거라."라고 말이죠. 

 

이러한 비참한 현실에 1927년 조국에서의 삶을 위해 돌아오게 됩니다. 유일한은 당시 한국인들의 건강 유지에 필요한 결핵약, 이전에는 미국에서 약품을 수입하여 팔던 유한양행이 1933년 처음 개발하여 판매한 제품인 진통소염제 안티푸라민, 혈청 등을 판매하며 사업을 진행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업이 번창하며, 한국 최초로 노동자에게 보상이 돌아가 종업원 지주제( 쉽게 말해 우리사주조합 - 주주가 되는 형태 ) 시행하게 됩니다. 이러한 사업의 번창으로 모범 납세 기업으로 선정이 되며, 정치와의 분리를 외치는 유한양행은 정경유착에 볼모로 세무조사를 당하게 되지만 오히려 모범납세한 기업으로 인정을 받아 박정희 대통령의 모범 납세 기업 표창장을 받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그는 일제 강점기의 독립군으로 활약을 합니다. 1942년 CIA의 전신인 OSS의(미군 전략처) 한국 담당 고문으로 활약하며, 재미한인으로 이루어진 한인국방경비대(맹호군) 창설을 주도하게 됩니다. 1945년 버지니아에서 12개국 대표 160명이 모인 IPR 총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여 전후 일본 처리 문제의 논의에도 가담합니다. 그리고 미국 워싱턴 OSS의 냅코 작전에 1조 조장으로 참가한다. 냅코작전에 참여한 공작원들은 OSS의 지휘 아래 강도높은 군사, 첩보훈련을 받게 되는데 이 당시 유일한의 나이 50살이었다.

 

광복이후 그는 대한민국의 재건과 국민의 건강과 복지를 위해 기업을 경영하게 됩니다. 1969년 노환으로 기업의 경영을 가족이 아닌 전문경영인에게 맡기게 됩니다. 이러한 전문경영인 도입은 대한민국 최초의 시행이었습니다. 그는 1973년 3월 11일 노환으로 돌아가시게 되는데, 손녀의 유학비를 제외하고는 모두 기부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돌아가시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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